2002-2004

예술가

..
반 고흐를 사람들은 너무 좋아한다.
에곤쉴레도.
그들의 작품은 그들의 삶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너무 강하고 열정적인 그림에서 즐거움만이 아닌 고통과 외로움,부대낌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그 작가까지 좋아한다.
하지만 정신병원에 갖히고 결국 이른 나이에 자살한 그의 생애를 몰랐다 해도 그의 작품만 보고 그것을 좋아할 수 있었을까. 강한 터치와 색, 뒤틀린 인간의 형체에서 지금 우리가 깊이 공감하는 그들의 외로움과 거부감을 느낄수 있었을까.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고, 일상적인 것들에 쉽게 익숙해지고, 또 작은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술가를 좋아한다. 결국 그들이 작품을 사고 예술가를 먹여살린다.
그러면서 어떤 것을 느낀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곳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강요당하는 수많은 논리들, 가치, 옳고 그름에 대한 거침없는 반항과 거부를 보면서 통쾌한 배설감을 느낄수도 있고, 그러면서도 그것들 안에서 살아야 하는 데서 오는 고독감을 보면서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낄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깊지 못하고 그럴수도 없다.

예술가의 삶이라는 말은 이상하다. 과연 예술가들에게도 삶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적어도 생활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나?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에게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나?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인간 간의 소통이 어려운 것처럼. 그것이 가능하다면 예술가들에게는 생활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고 더이상 외롭지 않을 테지만 그런 예술가에게서 반고흐와 같은 작품이 나올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예술가는 철저하게 외롭울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겉으론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어울릴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속으로는.
그러면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자신의 부대낌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의 생활이라면 생활이랄 수 있는 것일 거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항상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과 그 수많은 감정들 속에, 일상적인 것들에 깊은 애정을 가진 채 그것들 속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어야만 작품을 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있는 모습에서, 공감과 연민, 애틋한 감정, 분노의 감정, 인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미묘한 감정들이 진실되게 담겨진 작품이 나올 수 있고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고, 그제서야 그 낯선 이와의 소통이 가능할수 있을거다.
적어도 진실된 예술가라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과연 우리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일까. 길거리에서, 텔레비젼에서 컴퓨터에서 그들의 그림을 시를 보면서 좋다고 말할때 우리는 그 어려움을 대강 짐작만 할 수있을거다.
얼마전 김기덕이 더이상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글을 읽고, 그 뒤로 잡지에 연재된 글이 글을 낳는 지루한 찬반토론거리들을 읽고 영화를 보았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입을 닫고 단지 계속 작품을 하는 것을 택한 것이 한 순간, 이해가 된다. 남들한테 무관심한 세상에서, 자기 이익에 맞으면 돌아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술가들이 균형을 깨고 세상에 완전히 들어서려는 모습은 문을 닫아버리고 갇히는 모습보다 참을수 없다. 그렇게 위태롭게 균형을 잡는 존재의 외로움과 답답함을 짐작하면서도 차라리 예술가를 어떻게 보면 섣불리 좋아하면서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힘들어도 진실된 예술가가 정말 되고 싶다. 그것은 진정한 공감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계속해서 포기하지는 않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적어도 진실된 모습이다.
(2002.1)


막심 고리키 <이탈리아 이야기>중



.. 5.


젋은 음악가는 검은 눈을 들어 먼데를 응시하여 조용히 말했다.

「내가 작곡하고 싶어하는 음악은 이런 것입니다.」

큰 도시로 통하는 도로를 소년이 천천히 걷고 있어요.

도시는 육중한 건물 덩어리처럼 드러누워 대지를 짓누르며 신음하고 막연하게 웅얼거리도 합니다. 멀리서 보면 도시는 마치 갓 화재를 당한 것처럼 보이죠. 왜냐하면 도시의 상공에는 저녁놀의 시뻘건 불길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 교회의 십자가며 탑이며 풍향계 위쪽 끝이 붉게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검은 구름 층의 모서리도 역시 불길에 싸여 있고, 거대한 건물의 모가 난 단면은 붉은 반점 속에 불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는 상처 같은 유리가 반짝이고, 파괴되어 지친 도시ㅡ 행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곳 ㅡ는 피를 흘리며 빈사 상태에 있고요. 그리고 그 뜨거운 피는 흐느끼듯 누런 연기가 되어 가물거리고 있죠.

소년은 들판의 황혼 속에서 회색의 넓은 리본 같은 도시를 갇고 있어요. 칼처럼 곧은 그 도로는  보이지 않은 힘찬 손으로 도시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는 듯합니다. 도로의 양편에 있는 나무들은 아직 불을 붙이지 않는 횃불 같고, 그 거무스름하고 큼지막한 가지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무언의 대지 위에 정지되어 있지요.

하늘은 구름에 덮히고 별도 음영도 보이지 않는 깊은 밤은 쓸쓸하고 조용합니다. 오직 소년의 완만하고 경쾌한 걸음 소리만이 막 잠이 든 들판의 지친 침묵 속에 겨우 들릴 뿐입니다.

그러나 소년의 뒤에서는 밤이 소리도 없이 다가오면서 그가 걸어온 배후를 망각의 검은 망토로 덮어 버리죠.

어스레한 어둠은 점차 짙어지며, 높직한 언덕에 쓸쓸하게 버려진, 대지에 유순하게 매달리고 있는 붉고 흰 집들을 따뜻한 포옹 속에 감추고 있어요. 정원과 나무와 굴뚝ㅡ밤의 어둠에 짓눌린 사방의 것들은 모두 검게 사라져 갑니다. 마치 손에 지팡이를 든 소년의 모습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숨거나 혹은 희롱하면서......

그는 묵묵히 걸으면서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도시를 보고 있어요. 흡사 이 자그마한 소년 하나가 파랑과 노랑과 붉은 색으로 이미 요란하게 불타기 시작한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무엇인가를 가져가는 것 같습니다.

저녁 놀은 이미 꺼졌습니다. 십자가며 풍향계며 탑의 위쪽 끝은 녹아서 자취를 감추고 도시는 더욱 낮게 더욱 작아져 말없는 대지에 바싹 붙어있습니다.

도시의 상공에는 오팔 같은 구름이 불타서 펼쳐지고, 인광같이 누르스름한 안개는 빽빽이 붙어 있는 건물의 회색 그물 위로 제각기 드러눕습니다. 지금 도시는 불길에 파괴되고 피로 물든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지붕과 벽의 들쭉날쭉한 선은 어떤 매혹적인 것을 연상시키지만, 어떤 사람이 있어 사람들을 위해 이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다 피곤에 잠들며 환멸을 느끼고,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떠났거나 신념을 잃고 죽어버린 사람의 미완성 도시인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도시는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 쪽으로 아름답고 당당하게 우뚝 서는 자신의 모습을 보려는 간절한 희망에 싸여 있고요. 도시는 행복에의 희망에 들떠 웅얼거리고 있으며, 생활에 대한 열정으로 흥분되어 있습니다. 억압된 음향의 조용한 흐름이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들판의 어두운 정적 속을 흐르고 있습니다. 하늘의 검은 술잔은 혼돈과 고뇌의 빛으로 더욱 가득히 채워져 갑니다.

소년은 멈춰 서서 머리를 쳐듭니다. 그리고, 눈썹을 높이 치켜세우고 용감해 보이는 눈으로 앞 쪽을 조용히 응시합니다. 그리고 몸을 떨며 빨리 걸어갑니다.

그리고 밤은, 그 뒤를 밟으며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목소리로 조용히 그에게 말하죠.

「이젠 시간이 됐다. 어서 가거라!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물론 작곡을 할 수가 없습니다! 」

젊은 음악가는 걱정스런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잠깐 입을 다물고 있다가 손바닥을 붙이고 외쳤다. 작은 목소리로 불안한 듯이, 그리고 그리운 듯이...

「동정녀 마리아여! 무엇이 그를 맞아 줄까요?」
(2004.1.7)


찌름이



가끔씩 이야기를 듣다가 멍해질 때가 있다. 정지상태. 언제부터인지 알 수없지만 아무 이유없이 사람들 속에서 가만히 있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아마 그런 시간을 다 합치면 뭔가를 했던 시간보다 더 많을 것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아닌,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정지의 순간. 그래서 나에게는 항상 오가며 한 번씩, 얘기중에 한 두번 찔러주는 사람, 찌름이가 필요하다. 근데 언제나 그런 존재가 옆에 있을 수없다는 것이 나를 더 어렵게 한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스위치가 있는 인조 손가락이라도 항상 지니고 다닐수도 없고.
몇년 전부터 머리가 항상 멍하고 마치 솜이나 스편지같은 것으로 꽉 차있는 듯한 느낌을 수시로 느낀다. 사람많은 지하철이나 오후의 버스안에서 그런 느낌을 느낄 때 나는 주로 혼자였다.  그런 느낌이 갖는 무기력의 위험성때문에 나는 심지어 뇌검사를 받고 싶기도 하다. 이런 증상은 병원의 어느 진료실에서 담당하는지 알고싶다.
청량리 성심병원을 어머니와 함께 찾았던 오늘 낮에 나는 또 그런 증상에 빠졌다. 없던 병도 만들어서 생길 것 같던 그 병원, 좀 우울한병원에서 우리는 잠시 기다렸다가 허탕만 쳤다.똑같이 짧은 파마머리를 한 아줌마, 할머니들이 일렬로 앉아서 호명소리에 '네~'하고 크게 대답하면서 재빠른 동작으로 창구로 가는 걸 보았다. 앞에 앉은 할아버지의 얼굴의 거뭇한 점들, 머리가 헝크러지고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을 보게 되었다.거기서 나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드렸다.
그 순간에 내가 좀더 야무지고 활달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물들인 머리를 보면서 나는 답답함을 느낄 뿐이었다. 앉았다 잃어설때마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도움청할 일 많을때 왜 갑자기 허리가 또 도지는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하루종일 멍하니 앉아 생각을 한다.
나한테는 찌름이가 절실하다. 특히 오늘 같은날. 내가 성심병원에서라도 뇌검사를 받거나, 아니면 좀더 야무져지기 위한 하드 트레이닝을 받거나, 찌름이를 찾거나 아니면 인조 손가락이라도 만들거나 나는 어찌됬던 간에 빨리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
(2004.5.10)